탐험일지 #16 🧀 님, 치즈 하면 어디?

치즈 하면 바로 떠오르는 그 곳에 다녀왔습니다

2022. 2. 15.

탐험일지 #16🧀 치즈 하면 떠오르는 그 곳

이런 스타트업이라면 아무도 투자하지 않았을 거야

"임실이라고요? 치즈 취재 가셨군요?" 이야기를 나누던 중 뭔가 들킨 기분이 들었다. 요기레터 주제가 1급 기밀은 아니지만 릴리즈 전에 내 입으로 떠들고 다니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이번에는 숨기기 쉽지 않았다. "임실 다녀오셨어요? 아 치즈?" 미팅에서 만난 사람도 오랜만에 만난 가족도 임실이란 한 마디에 모두 간파했다. 한국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미 임실은 치즈였다. 영광은 굴비, 삼천포는 빠지기처럼.

그러나 임실과 치즈와의 관계에서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임실 치즈가 전국 단위 인지도를 가진 브랜드가 되고 관련 치즈 생산 업체만 13개가 되기까지 5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 과정에서 쉽게 된 것, 노하우, 관련 법령, 모두 없었다. 그 모든 게 가능했던 건 기획보다는 실행이었고 열정이라기보다는 소명이었고 인사이트라기보다는 우연 같은 운명이었다. 그 모든 일의 출발점이 된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었다.

치즈 하면 떠오르는 그 곳 : 임실 치즈 공장, 연구소 탐험

일시: 입춘이 지났지만 추웠던 목요일 아침
장소: 전라북도 임실군

탐험 난이도: 3.9/5.0

➡ 요기레터 시작 이래 최장거리 탐험

획득 물품: 각종 임실 치즈

지정환 신부가 겪은 대환장 파티

임실산 치즈의 주역은 지정환 신부(1931-2019)다. 지정환이라는 한국 이름을 갖기 전 그는 디디에 세스테벤스(Didier t'Serstevens)였다. 벨기에 브뤼셀 출신의 세스테벤스 가족이 모두 가톨릭 신자라 디디에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신부가 되기를 꿈꾸었다. 신학교에 다니던 중 몇 가지 이유로 한국을 택했다. 그는 한국에 오기 위해 런던으로 건너가 영어를 먼저 배워야 했다. 유럽에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이 런던 대학밖에 없었다. 디디에가 처음 한국 부산항에 도착한 1959년 12월 그는 부임지인 전주까지 10시간이 넘게 가야 했다. 당시 한국에는 포장도로가 거의 없었다.

지정환 신부의 치즈 이야기는 어떻게 이러나 싶을 정도다. 그는 처음에 부안에 간척지를 만들었다. 일을 하다 건강이 상해 수술을 받고 돌아왔더니 간척지를 분양받은 농부들이 모두 땅을 팔고 떠났다. 다음 부임지 임실은 대부분이 산지라 농업이 불가능했다. 동네에 산양 두 마리가 있어서, 산양유로 치즈라도 만들자고 한 게 임실 치즈의 시작이었다. 1966년 5월 시작한 이후로도 실패만 계속했다. 한국에는 치즈 생산 역사가 없었고 지정환은 치즈 지식이 없었다. 비누갑에 치즈를 굳히거나 막걸리 누룩으로 발효를 하는 등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시도가 이어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정환 신부는 3개월 동안 서유럽으로 치즈 연수를 가기로 했다. 그동안 한국의 조합원들이 한 명만 남고 모두 조합에서 탈퇴했다.

이 과정이 담긴 책이 남아 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중에도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움직이는지 알 수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서유럽의 낙농 선진국을 돌며 치즈 제작기법을 배우는데, 이탈리아 치즈 공장은 제작 노하우 공개를 거부(당연한 일)했다가, 이탈리아 공산당원이 (같은 천주교도라서) 몰래 노하우를 정리해 지정환 신부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다녀와 보니 조합원이 한 명뿐이어도 지정환은 포기하지 않고 결국 상품 수준의 치즈 제작에 성공했다. 그게 1969년, 미군 부대를 통해 암시장에서만 치즈를 구할 수 있을 때다. 지정환의 임실 치즈는 1970년대 조선호텔과 한국 최초의 피자집 등에 납품하며 규모를 키워나갔다.

메이드 인 임실 모차렐라 치즈

그 후로 훌쩍 시간이 흘러 우리는 어느 목요일 아침 임실치즈농협 앞에 있었다. 지정환 신부의 흔적은 곳곳에 희미했다. 이를테면 임실치즈농협 아래 적힌 since 1967 같은 글자 속에, 볕 좋은 마당에 있는 산양 두 마리와 젖소 한 마리의 조각 속에. 산양 두 마리는 임실치즈의 첫 재료를 제공한 동물이 산양 두 마리이고, 젖소 한 마리는 생산성을 위해 처음 들여온 동물이 젖소이기 때문이다. 그 옆에 지정환 신부의 흉상이 있다. 흉상 앞에서 기다리니 사람이 나와 우리를 공장으로 안내했다.

2022년의 치즈 공장은 어엿한 현대식 공장이다. 이날 본 치즈 공장에서는 모차렐라 치즈를 만든다. 원유를 살균하고, '스타터'라고 하는 유산균을 넣어 1시간 정도 숙성시킨다. 숙성시킨 원유에 응고제(rennet)를 넣으면 우유가 굳어서 커드가 된다. 이 커드의 온도를 높여 스트레칭을 시키고, 온도를 다시 낮춰 염지와 포장을 하면 치즈가 완성된다. 임실농협 치즈 공장에서는 요즘 하루 3톤 정도의 치즈를 생산한다. 라지 사이즈 치즈 한 판에 들어가는 모차렐라 치즈의 양이 보통 115g 정도, 3t 면 26,080판 정도의 피자를 만들 수 있다. 2020년 임실군 인구가 27,600명 남짓이니 이곳의 하루 생산량으로 임실군민 모두에게 피자 한 판씩은 돌아간다. 산양 두 마리 시절과 비교하면 대단한 발전이다.

"조금 징그러운 것 같은데요." 카메라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던 사진가 표기식이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발효와 숙성은 원초적인 일이다. 우유에 유산균이 섞여서 굳는 과정에서는 거품도 나고 색이 조금씩 짙어지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 우유라는 자연물이 치즈라는 공산품이 된다. 물 같던 우유가 쭉쭉 늘어나는 모차렐라 치즈가 되는 과정을 보다 보면 옛날 사람들 눈엔 이런 게 다 기적으로 보였겠구나 싶어진다.

치즈가 된 원유는 요기레터에서 익히 보셨을 공정을 거친다. 기계들을 거치며 거대한 원물이 조금씩 상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스트레칭을 마친 모차렐라 치즈는 수요와 공급 법칙에 따라 몇 가지 다른 진로를 거친다. 작게 포장하면 편의점의 스트링 치즈, 크게 포장하거나 잘게 썰면 피자에 들어가는 모차렐라 치즈다. 오늘 본 건 스트링 치즈 제조 과정이었다. 기계를 거쳐 가며 손가락 만한 한 입짜리 치즈의 모양이 나온다. 잠깐 소금물에 넣어 염지를 거친 후(그래서 공장에서 치즈를 바로 먹으면 조금 짜다) 포장 기계를 거쳐 검수 후 마무리된다. 현대 식품공장의 디테일은 다르나 원재료에서 패키징과 검수를 거쳐 포장과 출고로 이어지는 기본 흐름 자체는 모든 공장이 같다.

완연한 현대식 시설이 된 임실치즈농협 공장 안에서 이따금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지정환 신부의 흔적이 과연 남아 있을까. 공장 앞에 있던 산양 두 마리와 젖소 한 마리와 흉상은 그냥 물건일까. 상징은 상징일 뿐일까. 이런 질문을 수첩 안에 넣어 놓고 다음 취재처로 향했다.

임실만의 치즈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원래는 디자이너를 하고 싶었거든요." 마주 앉은 여성이 쾌활하게 말했다. 임실치즈&식품연구소 치즈 개발실의 최희영 실장이었다. 그는 학부 때부터 치즈를 연구해 박사 학위까지 치즈를 연구했다. 사회생활 경력도 모두 치즈 연구소나 식품회사, 치즈 외길을 걸은 치즈 전문인이다(요거트 편에 등장한 메종 키츠네 차림의 홍광락 연구원과도 아는 사이라고 했다). 그는 치즈의 기본적인 개념부터 오늘날 임실치즈의 현재와 미래에 이르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최희영 실장의 말에 따르면 치즈 맛을 이루는 요소는 아주 복잡하고 변수가 많다. 원유의 품질, 유산균의 종류, 숙성 기간과 숙성소의 상황이 모두 맛의 변수다. 어찌 보면 와인과 같다. 와인의 재료인 포도의 맛이 테루아에 좌우되듯 치즈의 재료인 원유의 맛은 결국 젖소의 사육 환경에 따라 변한다. 그 원유에 어떤 유산균을 첨가하고 어떤 숙성을 시켜서 맛을 결정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환경? 위도나 경도? 값비싼 시설? 다 아니다. 생산자의 입맛이다. 변수는 무한하기 때문에 생산자가 상황에 맞추어 어떤 맛을 추구하는지가 중요하다. 그 결과 한국의 치즈는 서양의 치즈보다 짠맛이 덜해진다. 한국 우유와 서양 우유의 지방함량이 다르고, 한국인이 서양인보다 덜 짜게 먹기 때문이다.

"남아 있죠." 신나게 인터뷰를 하고 망설이다 지정환 신부의 흔적이 실제로 이곳에 남아 있는지 묻자 최 실장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저에게도 여러 번 말씀하셨는걸요. "치즈 힘들어, 하지 마." 이렇게요."(웃음). 그러나 지정환의 존재는 추억 이상이다. 임실에는 지정환이 처음 치즈 가공용으로 팠던 땅굴이 남아 있다. 임실치즈연구소는 이곳을 검사해 당시 사용하던 유산균을 찾아냈다. 이 유산균이 있으면 1967년 지정환이 임실에서 처음 생산한 카망베르 치즈를 복원할 수 있다. "임실치즈만의 것을 만들기 위해서예요. 2023년 복원 완료, 2024년 상업화가 목표입니다." 최희영 실장이 말했다.

세상을 바꾼 뒤

거의 텅 빈 임실의 도로를 달리며 생각했다. 모바일 디바이스가 등장해 온 세상 사람들이 이 신묘한 기계를 쓰게 된 후 신흥 기업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이들의 '브랜드 스토리'는 똑같다. '세상을 바꾸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 '문제를 해결한다'. 무슨 세상을 바꾸어 어떤 세상을 만들까. 문제를 해결해 무엇을 얻으려는 걸까. 디디에 세스테벤스는 정말 모든 걸 바꿨다. 자신의 터전과 이름을 바꾸고 임실에 새로운 산업을 심었다. 치즈 만들 돈이 모자라 본가에서 지원을 받고도 그는 때가 되자 임실치즈에서 손을 떼고 장애인 복지에 힘썼다. 임실치즈마을 2층 기념관에는 생전 그가 했다는 말이 쓰여 있다. "내가 아니라 그들이 했다고 하라."

임실을 떠나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전주로 향했다. 전주 치명자산 얕은 중턱에 성직자 묘지가 있다. 지정환 신부는 2019년 세상을 떠난 후 이곳에 안치됐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삶을 걸고 낯선 나라로 떠나와 뭔가를 만든 후 그곳에 묻혀 있다. 그는 생전의 어느 인터뷰에서 (포장도로가 없는 것보다 힘들었던 건) "나무와 (클래식) 음악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잠들어 있는 치명자산은 이제 나무로 가득했고, 멀리서는 포장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에디터 박찬용 @parcchanyong

분석적이면서도 읽는 맛이 살아있는 글을 쓰는 잡지 에디터. 《에스콰이어》 등에서 일하며 라이프스타일 업계를 취재하고 페이지 만드는 일을 해 왔다. 에디터 업무 내내 식당 취재가 업무의 일부였다. 《첫 집 연대기》 등 책을 4권 냈다. 지금은 각종 매체에 칼럼을 쓰며 《요즘 브랜드 2》를 준비하고 있다.

포토그래퍼 표기식 @pyokis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