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떡하죠? 제주도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당근 촬영을 할 수가 없대요."라는 말을 촬영 전날 들었다. 취재 갈 사람들 이동편과 숙소와 렌터카까지 예약해둔 상황이었다. 내 머릿속에도 폭설이 내린 기분이었으나 어떻게든 해야 하는 게 이 일이다. 일단 가자고 했다. 가면 당근 주스라도, 뽑혀 있는 당근이라도, 아니 당근 상자라도 찍을 수 있겠지.
제주 왔으면 당근 한 번 뽑아 봐야지
일시 ㅣ 눈 내린 12월의 어느 아침
장소 ㅣ 제주시 구좌읍
탐험 난이도 ㅣ 4.0/5.0 ➡ 폭설로 취재가 취소될 뻔
획득 물품ㅣ 줄기가 달린 당근 네 개
제주 구좌읍 지역에서 당근 농사를 짓는 임봉천 대표는 우리에게 일단 네비게이션에 '종달수다뜰'을 찍고 오라고 했다. 아침에 식당에 도착하니 식당에는 하루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만 있었다. 곧 장화를 신은 임 대표가 도착했다. 그는 잠깐 앉아 보라더니 아무 말 없이 당근 주스 네 잔을 먼저 갈아 주었다. 한 모금 마시자마자 묻고 싶어졌다. 이게 당근만 넣은 게 맞습니까. 당근만 갈았는데 이렇게 달콤한 맛이 강하고 쓴맛이 없을 수가 있습니까. 아무 말 없이 갈아줄 만한 맛이었다.
당근 주스만 마시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밭으로 가기로 했다. 당근밭에 가는 길은 목가적인 영화가 생각나는 풍경이었다. 사장님의 2.5톤 트럭이 제주도의 현무암 돌담길 사이로 천천히 움직였다. 집 앞에 도착하자 사모님이 나오셨다. 트럭에 사모님이 타자 다시 천천히 움직여 근처 당근밭에 도착했다. 삼거리 모양 길가의 ㄱ자에 면한 부분에 밭이 있었다. 길 건너는 저수지. 오리들이 물 안팎을 오가고 있었다. 당근밭에는 눈이 하얗게 쌓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눈이 쌓여서인지 눈 앞에 보이는 건 길게 뻗은 풀 줄기 뿐. 이 풀만 봐서는 당근밭인지를 알 수도 없었다.
당근은 어떻게 캐는가
"당근은 이렇게 캡니다" 임봉천 대표는 이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자기 손 앞에 있던 풀줄기를 들어 올렸다. 땅에 기름이라도 발라둔 것처럼 당근이 매끈하게 쏙 올라왔다. 저렇게 쉽게 뽑혀 나올 수 있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그 다음 일은 더 예상 밖이었다. 당근밭 끝 부분이 조금 녹아 있었다. 농부 부부는 사진을 촬영할 정도로만 뽑아 주신다고 했다가 갑자기 본격적으로 앉아서 당근을 뽑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당근 수확의 증거는 사모님의 휴대용 의자 장착(?)이었다. 휴대용 의자의 줄을 두 다리에 끼우면 쿠션이 엉덩이 뒤로 꼬리처럼 붙는다. 매번 바닥에 주저앉으면 엉덩이가 젖을 텐데 휴대용 의자 덕에 멀쩡하다. 역시 혁신은 현장 관찰과 치열한 고민 끝에 나오는 단순한 결과물이었다.
"제주 왔으면 당근 한번 뽑아 봐야지!" 임봉천 사장의 말에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우산꽂이에서 우산 뽑는 것보다 쉽게 뽑아내시니 별로 안 어려운가 싶기도 했다. 예상일 뿐 역시 잘 안 뽑혔다. 당근은 허락된 자에게만 뽑히는 엑스칼리버 같은 걸까. "허운데기! 허운데기!" 옆에서 사모님이 말씀하셨다. '허운데기'는 제주도 말로 머리카락이니 당근의 머리채라 할 줄기를 잡고 당기라는 말씀이다. 힘을 더 주니 당근이 뽑혀 나오긴 했으나 분명히 내 수확은 농부 부부에 비해 덜 매끄러웠다. 그만큼 속도도 느렸다.
당근 사장님 부부의 수확 속도는 놀라웠다. 당근이 땅 속에서 땅 위로 알아서 뽑히려고 힘을 내나 싶을 정도였다. 사장님 부부는 당근을 캘 때 나처럼 힘을 많이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당근을 뽑을 때 힘이 들어가는 부분은 손가락 두 개가 전부다. 심지어 이 분들은 당근을 연속으로 뽑았다. 당근 줄기를 손가락 사이사이에 꽂아서 최대 한 손에 줄기 포함 당근이 4개씩 잡히는 것이었다. 사장님 부부가 한 손에 대여섯 개를 뽑다 보니 금방 당근밭의 한 부분이 비었다.
부부는 협업도 아주 잘 되었다. 사모님이 사장님에게 컨테이너 좀 가져오라고 이야기했다. 사장님은 운전을 해 집에 들러서는 당근이 담길 20kg 분량 대형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왔다. 나도 뭐라도 해야 할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농사를 할 수 없는 날이라고 하면서도 계속 해 주시니까. 겨울이니 바람도 불었으나 두 분은 제주의 겨울바람 앞에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나도 멈출 수 없으니 옆에서 당근을 날랐다. 당근이 20kg짜리 바구니 9개에 담겼다. 이걸로 오늘 수확 끝.
여기서 수확된 당근은 만화영화에 나오는 당근에 더 가깝다. 나는 당근 줄기가 그렇게 긴 줄 몰랐다. 당근 뿌리 길이에 비해 두세 배씩은 긴 줄기들이 당근 머리에 매달려 있었다. 그 줄기를 잡아 끌어올리는 솜씨가 당근을 수확하는 솜씨였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나는 당근 뿌리 근처의 줄기를 잡아 뽑았고 사장님들은 줄기의 끝에 가까운 윗부분을 잡아 뽑았다. 그런 디테일이 큰 차이를 만들었다.
당근은 어디로 가는가
지금까지 취재한 농산물들은 상품화가 되기 위해 거치는 과정들이 있다. 생산자가 손질을 하고 출하장으로 가서 품질을 확인한 뒤 상자에 넣어 출고한다. 임봉천 사장님의 당근도 그랬다. 당근의 줄기는 밭에서 다 자른다. 줄기가 잘리고 뿌리만 남은 당근을 세척한다. 개별 등급을 매긴다. 등급에 따라 상자에 넣으면 출고 준비가 끝난다.
임봉천 사장님은 이 모든 절차를 본인의 집에서 해결했다. 그는 몇 년 전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멋진 현무암 등으로 정원을 장식했다. 그림 같은 현무암 정원 옆에 역시 그림 같은 당근 출하 시설이 있었다. 당근 창고, 당근 세척기 등. 집 안에는 작업을 위한 전기 지게차까지 있었다. 임봉천 대표는 원래 이런 설비는 잘 보여주지 않는데 이날따라 기분이 좋으셨는지 보여주셨다.
당근 세척기가 인상적이었다. 트럭에 실려 온 당근을 세척기에 집어넣고 몇 분 기다리면 당근 세척이 끝난다. 당근 세척기는 기계식 세차장을 뒤집어둔 것같이 생겼다. 넓은 욕조 같은 세척기에 당근을 넣고 스위치를 올리면 당근 아래에 있는 세척 솔이 회전한다. 세척 솔과 당근들이 몇 번 비벼지고 나면 당근은 방금 세수한 얼굴처럼 반짝거린다. 씻은 당근이 쏟아지는 장면을 보면 내 잡념까지 깨끗해지는 기분이 든다.
임봉천은 세척기를 거쳐 깨끗해진 당근을 하나씩 선별했다. 당근의 등급은 크기와 모양에 따라 분류한다. 크기 순서에 따라 왕, 특, 상 순서다. 왕은 어감처럼 크고 풍요로우나 임봉천의 설명에 따르면 왕이라고 더 맛있는 건 아니다. 임봉천이 '이 정도가 딱 맛있는 거'라며 들어서 보여준 건 작은 당근이었다.
당근의 급수를 매기는 걸 보며 생각이 많아지기도 했다. 왕, 특, 상은 크기라는 시각적 지표에 따른 분류다. 등급외 당근도 있다. 등급외의 기준 역시 맛이 아니라 생김새다. 너무 크거나 작거나, 혹은 약간 갈라진 부분이 있거나 인삼처럼 뿌리가 두 갈래로 갈라진 것 등이 등급외다. 모두 같은 밭에서 나온 같은 맛의 당근인데 기준은 크기와 모양 뿐이다. 시각적 분류가 효율적이고 직접적인 기준이겠으나 당근의 맛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사는 것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의 맛, 당근의 맛
이게 당근 맞나 싶을 정도로 달콤한 임봉천 사장의 당근을 먹을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일단 사장님 본인께 주문하면 된다. '종달수다뜰'로 전화하면 주문 가능하다. 종달수다뜰에서도 당근주스를 판다. 가서 밥을 사 먹어도 당근 주스를 준다. 구좌읍 해변에 자리한 카페 '오스모시스'에서도 임봉천 사장님이 지은 당근을 갈아 당근 주스를 먹을 수 있다. 보광동 헬카페에서도 이곳의 당근을 받아 당근 주스를 만든다.
구좌 당근을 갈아 만든 당근 주스는 싸지 않다. 가격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사람이 본다면 '너무 비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크리스마스 근처에 눈 쌓인 밭에서 초로의 부부가 당근을 바람처럼 캐는 걸 본 입장에서 그 당근을 비싸다고 못 하겠다. 당근을 캐던 중 "당근은 제일 더울 때 씨를 뿌리고 제일 추울 때 걷어요."라고 임봉천 사장님의 사모님이 말씀하셨다. 사실이었다. 당근을 옮기는 내내 바다에서 온 삭풍이 불었다. 내가 실제로 이 분들의 일을 도운 시간은 한 시간이나 될까? 고작 그 정도 돕고도 손이 터서 며칠 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모두가 그 노고를 상상하며 당근 주스를 마시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다만 현장 어디에도 판타지는 없다. 예쁜 영상 속 '리틀 포레스트' 같은 세상은 없다. 칼바람이 부는 겨울 밭에 주저앉아 당근을 뽑는 농부들이 있다. 그 농부들이 따온 당근을 세척기로 돌리고 상자에 담아 육지로 보내어 사람들이 갈아줬을 때 그 예쁜 색깔의 당근 주스가 나올 뿐이다.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는 과정을 거쳐야 아름다운 게 나오곤 한다.
다만 이날 무슨 이유였는지 당근을 수확해주신 임봉천 사장 부부께는 특별히 감사를 표하고 싶다. 이 분들은 사실 더 기다렸다가 수확하면 왕 등급이 될 수 있는 당근을 우수수 뽑으셨다. 사모님은 그 추운 날씨에 맨손으로 저수지의 차가운 물로 당근을 씻은 뒤 우리에게 먹어 보라며 줄기째 건네주셨다. 밭에서 바로 씹어먹는 당근의 감촉이 아직 잇몸에 남아 있는 것 같다. 농부 부부는 줄기가 그대로 붙어 있는 당근 네 개를 꽃다발처럼 선물로 주셨다. 우리는 그 당근을 계속 가지고 다녔다.
제주 당근 이모저모🥕
제주는 한국에서 당근이 가장 많이 나는 곳이다. 한국 당근 생산의 70%가 제주산이다. 기후 때문이다. 당근은 7~8월에 파종해 12~3월에 수확한다. 한국에서는 제주와 경남에서 재배하며, 가을에 나오는 건 평창 고랭지산이다. 1991년 한국에서 유통되는 당근 점유율은 99.4%가 국산 당근이었다. 세대가 몇 번 돌고 난 지금은 중국산, 베트남, 뉴질랜드에서도 당근이 수입된다. 세상이 끊임없이 바뀌는 건 내 분야만이 아니다.
제주 당근은 왜 맛있을까. 당근을 자라게 하는 게 기후라면 제주 당근을 맛있게 하는 건 지리다. 지리 중에서도 흙이다. 제주의 흙은 화산성 흙이라 얇고 가벼운 다공성 토질이다. 물이 잘 빠진다는 뜻이다. 물이 잘 빠지면 당근에 쓴맛이 배지 않는다고 임봉천 사장은 말했다. 그는 당근에 쓴맛이 도는 걸 '석유 맛'이라고 표현했는데 생각해보니 정말 그 맛이었다. 비슷한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들은 적이 있는데 작년에 한재 미나리를 키우던 청도였다. 한재 미나리를 키우는 곳도 물과 흙이 좋아서 미나리가 맛있다고 했다. 물은 맑고 흙은 물이 잘 빠져서 속이 비고 깨끗한 미나리가 나온다고 했다. 당근도 미나리과니까 미나리과 식물들에게는 물이 잘 빠지는 토양이 중요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