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가 시작될 것 같은 밤
"알록달록한 건물로 오시면 됩니다."라는 말처럼 건물은 어둠 속에서도 알록달록한 색이 다 보였다. 그 건물 2층 텅 빈 사무실에 어떤 남자가 등을 돌린 채 모니터를 보고 있다가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화훼사업지원부 담당자, 오늘 꽃 경매의 세계를 알려줄, 연유빙수처럼 뽀얀 피부 위로 얇은 티타늄 안경테를 쓴 동안의 남자였다. 그는 1층이 보이는 난간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눈 앞이 모두 초록이었다. 식물이 아니라 화학의 초록색. 초록 우레탄 바닥 위로 초록색 짐차가 축구장 두 개쯤 될 법한 넓이의 광장 같은 경매장을 가득 채웠다. 짐차에는 폭이 좁고 길이가 긴 종이 상자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 상자 안에 전국의 화훼농가가 키운 꽃들이 들어 있었다. 그 짐차들이 격자로 질서 있게 놓이고, 그 사이로 사람들이 다니면서 눈으로 살피고 손으로 뭔가를 계속 적었다. 경매가 시작하기 전에 필요한 정보를 모아두는 거라고 했다. 뭔가 시작될 듯한 분위기가 돌았다.

뭔가 시작될 분위기는 광장 같은 경매장 중앙에 설치된 컬러 스크린에서도 느껴졌다. 직사각형 스크린 안에는 자동차 엔진 회전수 계기판 같은 게이지가 계속 위아래로 움직였다. 게이지 옆에는 뭔가 쓰여 있을 듯한 빈칸들이 있었지만 아직 적혀 있는 건 없었다. 이 전광판이 오늘 경매의 상황판 역할을 할 것이었다. 설명을 듣고 구경을 하는 동안 자정이 되었다. 양재 화훼공판장의 절화 경매가 시작됐다.

경매 읽는 법
경매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고조되는 분위기. 알 수 없는 암호 같은 신호들. 여기에는 전혀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 없을 듯했다. 빈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좀 많아지나 싶고, 테스트 화면이 움직이던 전광판에 실제 내용이 표시될 뿐이다. 그 내용 역시 문외한의 눈에는 너무 빨리 지나가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하이~" "하이~" "하이~" "하이~" 대신 티벳 승려의 수련 같은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경매 참가자의 시선에서 오른쪽 경매실에 앉은 경매사는 시종 무표정으로 "하이~"를 외치고 있었다. 옆에서 전산담당 과장이 설명을 시작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경매는 호창으로 시작한다. '경매 시작합니다'라는 뜻의 음성 기호다. 호창으로 시작해 순식간에 '어디(업체)'의 '누가(생산자)' '어느 등급'의 '물건(품목명)'을 '얼마나(수량)' 가져왔는지 알려주고, 그에 따라 응찰자들이 응하면 경매 하나가 끝난다. 화훼 경매의 경우는 입찰 근거가 될 모든 정보가 전광판에 뜬다. 때문에 경매사가 입으로 내는 소리는 호창뿐이다. 그 호창이 "하이~"여서 그 소리만 들리는 것이다. 하긴 매번 "경매 시작합니다~!"라고 부르기엔 시간이 짧다. 이날은 8월이고 성수기에 비하면 물량이 1/2 정도인데도 이들이 오늘 결정지어야 하는 경매만 1천 건에 가까웠다. 

더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옆의 분도 계속 호창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귀를 기울이자 소리가 들려왔다. "우웅~" "우웅~" "하이~"는 두 개의 모음이라도 있었다. 이건 인간의 음성이라기보다는 주파수에 가까웠다. 그러나 담당자의 귀에는 특정 품종을 말하는 것까지 들린다고 했다. 경매는 그 자체로 별도의 예술이며 경매 언어는 그 자체로 해독이 필요한 외국어였다.
 
경매에도 종류가 있다. 화훼사업센터 경매방식은 하향식 경매라고 부른다. 우리가 아는 영화 속 경매("오천!" "육천!" "만!") 같은 건 상향식 경매다. 영국식 경매라고도 한다. 상향식 경매의 기술적 문제는 시간이다. 가장 저렴한 최고 입찰가를 위해 사람들은 눈치를 보고, 거기서 시간이 지체된다. 시간이 신선도와 직결되고, 신선도가 가치에 직결되는 농수산물에서는 치명적인 단점이 될 수 있다.
 
하향식 경매는 이 부분을 해소했다. 미리 경매사가 특정 가격과 하한가를 정해두고 경매 시계가 움직인다. 자동차 RPM 게이지 같던 그 동그라미가 경매 시계다. 낙찰자들은 자신의 판매가를 알릴 필요가 없이 내가 원하는 가격에서 응찰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예를 들어 10,000원에서 시작한 품목을 8,000원에서 누르고 싶은데 누군가 8,500원에 누른다면 내가 진다. 조금 다른 방식의 눈치 싸움이자, 순발력이 훨씬 강조되는 경매 방식이다. 이걸 네덜란드산 경매라고도 부른다. 네덜란드는 세계 최대 화훼 생산국 중 하나다.

세상 모든 곳의 디테일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니 모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경매사 앞에서는 꽃들을 옮기는 분들이 꽃다발을 한 뭉치씩 빼서 자유의 여신상의 횃불처럼 들어올렸다. 그 꽃을 본 경매 입회인들이 '내가 입찰하려는 물건이구나' 라고 확인한 뒤 순식간에 응찰하는 거라고 했다. 경매가 시작되기 전 꽃 사이를 다니면서 뭔가를 계속 살피고 적던 것도 응찰을 위한 준비다. 표기된 등급과 실제 상태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뒤 얼마에 입찰을 할 지 계산했던 것이었다. 이 경매장에서 오가는 경매 금액만 하룻밤에 최대 3억 원에 이른다. 큰 돈이다. 큰 돈이 오가는 현장 특유의 긴장감이 "하이~"와 "웅~"사이에서 시냇물처럼 흘렀다.
 
담당자의 설명과 독경 같은 경매 호창 사이로 경매가 계속됐다. "하이~" "웅~" "하이~" "웅~" 사이로 경매장을 가득 채운 꽃들이 경매장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문외한들이 모르는 새에 경매가 끝난 꽃들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경매가 끝났을 뿐이다. 이날 해야 할 경매는 1,000여 개에 달했다. 말 한마디 없는 경매장 안에서 "하이~"와 "웅~"을 듣다 보니 그 호창에도 이유가 있음을 깨달았다. "하이~"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고음, "웅~"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저음이다. 거기에 주요 정보는 시각 정보로 표시므로 한 장소에서 두 개의 경매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역시 모든 일에는 디테일이 있다.

세상은 넓고 산업은 많다
거의 모든 건물에 불이 꺼진 양재IC 근처에는 매일 밤 수억 원이 오가는 경매가 열린다.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중개하는 사람도 미묘하게 긴장한다. 그 경매가 끝나고 수도권 전역에 꽃들이 퍼지며 우리가 그 하나를 산다. 누군가의 몇 달 농사 값이 10초 가량의 경매 시계 사이에서 결정된다.
 
그 현장을 취재하고 나오는 길에 경매장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누군가는 꽃을 들고, 누군가는 상자 속 꽃을 계속 옮겨 담고, 누군가는 짐차들을 붙여서 계속 나가게 하고, 그 사이로 DJ부스같은 경매실 안에서 두 중년 남자가 "하이~"와 "웅~" 호창을 하며 경매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진지하고 다급한 순간일 텐데도 멀리서 보니 일사불란한 약속으로 이루어진 행위예술처럼 보였다. 나의 일도, 당신의 일도 멀리서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도시는 결코 잠들지 않는다. 모두 잠든 시간과 공간에서도 어딘가의 누군가는 깬 채 일하고 있다. aT센터 길 건너에 현대자동차 사옥이 있다. 촬영이 끝나고 그 건물을 보니 거기도 불 꺼지지 않은 창이 몇 개 있었다. 오늘 경매장에서 진지하던 사람들처럼, 불 꺼진 사옥 중 몇 안 되는 불 켜진 방에서 누군가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도시와 문명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엄청나게 빨리 돌아가는 도시 문명에게 꽃이라도 한 송이 놔 주고 싶은 밤이었다.

한마음왕족발 서울특별시 성동구 독서당로 293-8
포토그래퍼 강지훈 @baechu.me

글ㅣ주현욱 @hyeonuk_joo 굵은 이두박근과 섬세한 감성을 가진 에디터. 곧 해외 출장을 간다.

사진ㅣ조서형 @veenu.82  튼튼한 자전거를 타고 축구를 하러 가는 에디터. 지난 주말 부친 생일 파티를 열었다.